We have a list of not conforming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ing transformed by renewing the mind.
“Love must be sincere” (Romans 12:9) is impressive to me. How can we attest that our love is sincere?
(1) By hating the evil
(2) By devoting me for others/ by honoring other people
(3) By serving the Lord with spiritual ferver
(4) By joy in hope/ patient in affliction/ faithful in prayer
(5) By sharing mine with the needy.
(6) ByRejoicing with those who rejoice/ mourning with those who mourn.
(7) By overcoming evil with good.
For me, today, God told me (4) and (6) are the things what He wants me to do today. Lord, please help me.
예배는 삶의 방식입니다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가 잘 드러난 곳은 요한복음 4장입니다.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How가 중요하다는 것,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배에 대한 바울의 정의가 잘 드러난 부분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바울은 예배가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는 것!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Transform 되는 것!
내가 가진 최선으로 타인과의 비교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
이 얼마나 숭고한 예배의 정신인지요… 이 얼마나 따르기 힘든 예배의 정의인지요… 하지만 오늘은 이런 삶을 살기위해 온 힘을 다하는 날이 되어야 겠습니다. 제 삶에 세상을 따라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다시 점검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우쭐하거나 자괴하는 곳이 어딘지를 살피고,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시간을 투자하겠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왜 믿음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받았을까? 왜 나는 유대인도 아닌데 아브라함을 믿음의 본으로 알고 좇아가야 하는걸까? 오늘의 말씀은 “믿지 못할 것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100세가 다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받았다. 예수님이 모든 이를 대신해서 죽고 그 분으로 인해서 내 죄가 사해진다는 말씀은 믿기가 힘든 이야기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것이다. 열흘만에 남은 모든 학업들을 다하고 시험을 이번 달 안에 마무리하는 것은 믿기가 힘든 이야기다. 하지만 믿음의 열심이 나를 약속의 성취를 보는 자리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99세에 부부간의 관계를 하는 노력을 했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그려보면 재미있다. 나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앞으로 나의 20일이 내 삶을 결정할 것인데,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노력을 감당할 것인가?
믿음은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끈질김과 그 성취를 위해 하나님과의 동역을 마다하지 않는 나의 삶의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성취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쉬지않는 발걸음. 거기에 진정한 호시우행의 삶이 있다.
자기부터 살피라!
제사장의 위임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사법의 설명이 끝나고 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끝나고 난 후 첫 제사장인 아론의 제사가 드려집니다.
그런데 제 눈을 끌었던 것은 다른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제사장을 위한 제사를 먼저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제사장을 위한 제사는 가장 비싸고 좋은 제물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족장들의 제사 보다도 더 좋은 제물을 사용해야 했으니까요.
이 사실은 제사장의 지위가 다른 이들보다 높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사장의 정결함의 정도가 다른 이들보다 높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거지요. 다른 이를 위해 제사드리기 전에 스스로를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다른 이를 향한 눈을 가지기 전에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목사의 직임에는 제사장의 임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기부터 살피는 일에 매진하는 하루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왕같은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누군가를 향한 판단보다 스스로의 정결함을 먼저 돌아보는 하루가 되겠습니다. 아내에게, 아들에게, 주변의 친구들에게, youth 아이들에게… 먼저 그들을 향한 말을 하기 보다 오히려 침묵속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살피는 하루가 되겠습니다.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우겠습니다. 저를 유혹하는 게으름, 섭섭함,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는 자세,… 이들로부터 저 스스로를 정결케 하기 위해 온힘으로 기도하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겠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기도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마음아픈 베드로의 모습, 그렇기에 내가 참 좋아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나옵니다.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진심이었을 겁니다. 정말 주와 함께 죽을 생각을 하며 혼자서 비장하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야속해서 먹먹해져오는 가슴을 혼자서 다스려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후에 베드로는 마음 속으로 수십번이나 다짐했겠지요. 나는 그렇게 살리라! 절대로 우리 주님을 떠나지 않으리라!
우리 주님과 함께 끝까지 가겠다는 베드로의 결심은 피곤함 앞에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주님을 따라 죽기까지 하겠다던 그의 결심은 우리 선하신 주님의 기도에는 함께 반응하지 못합니다. 결심은 쉽습니다. 비록 그 표현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곳까지 (‘죽을지언정’) 이른다 하더라도 결단하고 결심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 결심은 나의 내적인 삶의 강인함으로 지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내적인 삶의 강인함은 육체의 피로 앞에서도 부질없이 무너져 버리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결심하시지 않으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의 기도!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고 드리는 세 번의 기도! 이 기도가 우리 주님의 사역을 끝까지 지속할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이었다고 오늘 주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결심은 내 내적인 삶의 강인함 만큼 지탱할 수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기도는 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강인함만큼 지탱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에 결심한 것은 무너지기 쉽지만 기도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온 삶을 걸고 하나님과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쉬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기도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결심이야 원없이 해 봤습니다.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지만 오늘은 내 자신의 삶을 걸어놓고 하나님과 세 번 기도하는 예수님의 심정으로 살아보렵니다. 내 삶의 지속성을 내적인 강인함에 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선하신 주님의 약속에 걸겠습니다. 그래서 무너지지 않는 기도의 성을 쌓아가겠습니다. 이 기도의 성에 나 자신과 나와 함께 있는 모든 이들의 삶에 무너지지 않는 주님의 응답을 채워가겠습니다.
주님, 제가 기도로 무너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둘 다 옳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선하신 주님이 이 땅에서의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한 여인이 나아와서 귀한 향유를 우리 주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 사건을 바라본 제자들의 반응이 참 재미있습니다. “왜 그 귀한 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이들을 나누어주지 않았느냐?”라고 따지면서 여인에게 들이대고 그것을 허락하신 우리 주님에게 들이댑니다.
나는 교회를 다닌지가 꽤 됩니다. 6살 때부터니까 벌써 30년이 넘게 교회생활을 해오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랬더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보았을 때 어떤 이야기로 반박하면 상대가 대답을 못할지 눈에 선합니다. 둘 다 옳은 일을 가지고 선택을 강요하면 됩니다. 오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도 옳은 것이고 가난한 이를 돕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도 비난 받아서는 안됩니다. 드리는 이의 마음에 우리 주님이 주시는 감동대로 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친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Refresh 해 드리는 일은 ‘틀렸다’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이 더 좋았다라는 우리 생각이 ‘옳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제자들의 이 말은 이렇게 표현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너는 따라오지 않느냐? 그래서 우리는 네가 한 일이 싫다.” 그러므로 이 일은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라 호불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내가 싫다’고 말하면 속좁은 사람처럼 보일까봐,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볼까봐, 내가 한 말에 권위가 주어지지 않을까봐… ‘네가 틀렸고 나는 옳다’라고 말합니다. 밖으로 드러내서 말하며 들이대기도 하고 스스로의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를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갖다붙이기도 하구요.
오늘은 스스로에게 솔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 선하신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사실은 내가 싫은 것은 아닌지. 혹시나 둘 다 옳은데 내 스스로를 헛된 권위로 둘러쳐서 다른 사람의 옳음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가까운 사람들부터 기도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랬던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는 하루가 되어보려고 합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도 기름이 없을까 무섭습니다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 모든 처녀들이 등은 가지고 왔는데 기름은 없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등은 삶이겠지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것… 기름은 그 삶을 채우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겠지요. 살아가지만 구체적인 삶의 방식은 공허한 사람들. 향기로운 기름으로 채우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채워가는 사람들…
하루하루의 삶을 향기로운 기름으로 채우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주님이 오시는 결정적인 그 때에 슬피 울며 이를 갈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무섭습니다. 내 삶을 향기로운 기름으로 준비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까 무섭습니다. 나도 주님 오셨을 때 기쁜 마음으로 뛰어 나가기는 했는데 공허한 삶의 방식으로 인해서 등을 태울 기름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결심에서는 늘 성자지요. 하지만 그 결심이 삶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변화되는건 또 다른 문제니까 두렵습니다.
어제의 제 삶도 공허했습니다. 기름으로 가득찬 삶을 살지 못했거든요. 오늘은 가능할까요? 주님이 가리키시는 방향으로만 제 삶을 고정시키고 그 길로만 뛰어가는 일이 오늘은 가능할까요? 슬피 울며 이를 갈까 두렵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찾아다니다가 내게 필요한 것, 내가 필요한 사람의 필요를 다 잊고 살아가는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어, 기름이 없네?’라고 이야기할까 무섭습니다.
오늘은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키는 날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악취가 아니라 향기로운 기름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필요한 것, 내가 필요한 사람에게로 가는 하루가 되겠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Standing by myself
“사람은 두 다리가 부러지고 나서야 스스로 서는 법을 배웁니다.”
부모를 다리 삼아, 학력을 다리 삼아, 재력을 다리 삼아, 인기를 다리 삼아 서려는 사람은 평생 자신의 다리로 서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맙니다. 나는 스스로 서 있나요? 내가 서 있는 다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치열한 고민과 기도 속에서 얻어내고 만 내 스스로의 것인가요?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나를 제대로 서 있게 하지 못합니다. 내가 교회에서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가가 나를 서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리가 부러지거나 스스로 부러뜨리고 나서야 나는 스스로 서는 법을 배울 수 있나 봅니다.
공부가, 평가가 나를 두렵게 하는 모든 순간에 그것들로 서려는 생각을 버리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님과의 치열한 기도가 나를 스스로 서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이 없습니다.
어떻하면 나를 버릴 수 있습니까? 어떻하면… 어떻하면…
뭘 하다가 주님을 만날까요?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이 오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신다면 참 기다리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먼저이고, 그러면 늘 준비하고 있어야지라는 생각이 두 번째입니다. 늘 준비한다는 말도 제게는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늘 준비하는 것일까? 늘 준비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대학을 다닐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시면 좋을까?” 라는 질문들을 친구들이랑 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으니까 언젠가는 분명히 오실건데 만일 그 분이 내가 살아있는 중에 오신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 때 만나면 좋을까… 뭐 이런 질문이었지요. 저는 참~~~ 재미도 없고 진지하기만 했던 (지금도 그렇지만… ㅋ) 사람이어서 ‘기도와 예배하는 중에 오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선배 하나가 ‘나는 주님이 곧 오신다면 공부하다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 대답이 제게는 참 이상해서 무슨 말인지를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그 선배가 찾아서 읽어준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4:40-42)”
밭에 있다가 들려지고, 맷돌질을 하다가 들려지는 삶!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을 최선으로 살아가다가 그 삶의 자리에서 들려지는 삶! 그게 자기에게는 가장 아름답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 때 그 선배에게 하나님이 주신 삶은 공부하는거니까 공부하다 만났으면 좋겠다는 거였습니다. 이 대화는 내 삶에서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금 주신 가장 큰 일은 우리 Youth 아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자라가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아이들과 상담하다가, 아이들을 위한 설교를 준비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네요! 언제 오실 주님의 날을 모르기 때문에 늘 준비해야 할 일은 이것들이네요.
주님, 오늘도 내 삶을 가득채우는 선하지 못한 생각과 게으름에서 벗어나 주께서 주신 아이들을 위해 내 삶을 투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해야 할 아이들, 상담해야 할 아이들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하다가 주님이 오신다면 기쁨으로 주께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래의 찬양가사는 내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부르는 노래입니다. 흙과 땀이 온몸을 적시도록 온힘을 다해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주님 오시면 할렐루야 하고 가는 삶을 기대합니다.